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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왜 ‘해동성국’으로 불렸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의 실체

by 한끗 2026. 3. 7.

발해는 한국 고대사에서 자주 언급되지만, 실제로 어떤 구조와 역량을 가진 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발해를 설명할 때 따라붙는 표현이 바로 ‘해동성국’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동쪽 바다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인데,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발해가 차지한 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에 가깝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등장한 국가였고, 한편으로는 옛 고구려 계승의식을 바탕에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 일본, 말갈 세력 등과의 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해 갔다. 따라서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영토가 넓었다거나 문화가 발달했다는 수준을 넘어, 국가 운영 체계와 대외관계의 실체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발해는 왜 ‘해동성국’으로 불렸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의 실체
발해는 왜 ‘해동성국’으로 불렸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의 실체

 

특히 발해의 위상은 내부 체제의 안정과 외교적 능력이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설명된다. 국가는 내부가 취약하면 대외적으로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고, 반대로 외교적으로 고립되면 내부 역량이 충분해도 국제적 평가를 얻기 어렵다. 발해는 중앙집권적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 광대한 영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며, 주변 국가들과 다층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이 글에서는 발해가 왜 ‘해동성국’으로 불렸는지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발해의 국가 운영 방식과 통치 구조는 어떠했는가. 둘째, 발해는 주변 국가들과 어떤 방식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자신의 위상을 확보했는가. 셋째,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이 실제 발해의 실상을 얼마나 정확히 반영하는가. 이를 통해 발해를 단순히 번영한 나라로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인 복합적 국가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중앙집권과 지방 지배 체제는 발해의 기반이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국가 운영 체계가 상당히 정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나라가 외부에서 강국으로 평가받으려면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넓은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권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며, 행정 질서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발해는 이런 조건을 비교적 충족한 국가였다. 발해의 정치제도는 흔히 당의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설명되지만, 이것을 단순 모방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선진 행정체계를 참조하면서도 자국의 상황에 맞게 조정해 국가 운영에 활용했다. 즉, 제도를 빌려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제도를 실제 통치에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력과 정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발해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질서를 구축하고,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행정체계를 발전시켰다. 특히 3성 6부를 두었다는 점은 발해가 단지 부족 연맹 수준의 국가가 아니라 정교한 정치 운영을 지향한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다만 발해의 6부 명칭이 유교적 덕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당 제도의 수용이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상징적 재해석을 동반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발해가 국제질서 속에서 문명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제도적 형식을 갖추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반영한 방식으로 제도를 운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발해가 제도를 갖췄다는 사실보다, 그 제도가 왕권 강화와 행정 효율이라는 실질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지방 통치 체제 역시 발해의 강점을 보여준다. 발해는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했기 때문에 수도 중심의 직접 통치만으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방에 대한 체계적 편제가 필수적이었다. 발해가 5경 15부 62주 체제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발해가 공간적으로 분산된 지역을 조직적으로 묶어 관리하려 했음을 뜻한다. 여기서 5경 체제는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컸다. 여러 거점을 두는 것은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장치였고, 동시에 다양한 지역 집단을 국가 체제 안으로 포섭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특히 발해는 고구려계 주민뿐 아니라 말갈계 주민을 포함한 여러 집단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지방 지배의 안정성은 국가 존속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발해가 비교적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지방 통치 구조의 정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 기반 역시 국가 운영의 안정성과 연결된다. 발해는 넓은 평야, 산림, 하천, 해안선 등을 바탕으로 농업, 수렵, 목축, 어업 등 다양한 생산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발해 경제의 구체적 규모를 오늘날처럼 정밀하게 복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가가 장기간 외교사절을 보내고,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계를 유지하며, 상당한 문화적 성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즉 ‘해동성국’이라는 평가는 단지 외교적 수사나 타국의 과장된 인상만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 운영을 지속할 수 있는 행정력과 물적 기반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결국 발해의 강점은 강한 왕권과 정비된 관료체제, 넓은 영토를 관리하는 지방 행정 구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경제적 토대가 결합되었다는 데 있다.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 유민이 세운 후계국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 질서를 구축한 운영 능력 있는 국가였다. 이런 점에서 ‘해동성국’은 발해의 화려함을 장식하는 별칭이 아니라, 국가 운영 역량에 대한 동시대의 평가로 이해할 수 있다.

 

2. 발해의 외교는 종속이 아니라 다면 전략에 가까웠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린 또 다른 핵심 이유는 대외관계에서 보여준 적극성과 유연성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국가의 위상은 국내 정치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주변 강국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국제질서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고 타국으로부터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매우 중요했다. 발해는 당과의 관계, 일본과의 교류, 북방 세력과의 긴장과 조정 등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외교 환경을 만들려 했다. 따라서 발해의 외교를 단순히 ‘당에 조공했다’ 혹은 ‘일본과 친했다’는 식으로 정리하면 실제 모습을 놓치게 된다. 발해 외교의 핵심은 생존을 위한 적응과 위상 확보를 위한 전략이 동시에 작동했다는 데 있다.

 

우선 당과의 관계는 복합적이었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당과 긴장 관계에 놓였다. 발해의 성장 자체가 당 중심 질서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발해는 당과 충돌만 반복하지 않고 외교적 관계를 형성해 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발해가 당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종속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는 형식상 위계질서를 전제로 했지만, 실제 운영은 훨씬 현실적이었다. 많은 국가들이 이 체제를 이용해 무역, 정보 교환, 외교적 승인이라는 실질적 이익을 얻었다. 발해 역시 당과의 관계를 통해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문물 교류의 통로를 넓혔다. 즉 형식상 당 중심 질서에 참여했더라도, 내용상으로는 국가 이익을 계산한 외교 행위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일본과의 관계는 발해 외교의 독자성을 잘 보여준다. 발해는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며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런 점은 발해에게 외교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를 통해 당을 견제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고, 일본은 발해와의 관계를 통해 대륙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힐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단순한 친선 교류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외교적 다변화는 발해가 단순히 주변 강대국의 압력을 받는 수동적 국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발해는 북방 여러 세력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조정과 대응을 반복했다. 발해가 자리 잡은 공간은 농경 세계와 초원 세계, 해상 네트워크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따라서 발해는 남쪽의 신라, 서쪽의 당, 동쪽의 일본뿐 아니라 북방 및 동북방 세력과도 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외교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안보 전략이었다. 발해는 때로는 군사적 긴장을 관리하고, 때로는 외교 사절을 통해 관계를 조정하며, 경우에 따라 교역을 통해 충돌을 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넓은 영토를 유지하는 국가일수록 국경 관리와 대외관계의 연동이 중요했는데, 발해는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 더 짚어야 할 점은 발해의 외교가 문화 교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신 왕래는 단지 국서를 교환하는 절차가 아니라 사람, 물자, 정보, 제도가 이동하는 통로였다. 발해는 이런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각인시켰다. 당과 일본에 발해 사신이 반복적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발해가 국제적 소통 능력을 가진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국내 정치의 수준과도 연결된다. 외교는 내부가 안정되어야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발해 외교의 성과는 국내 역량의 반영이기도 했다.

 

따라서 발해의 대외관계를 볼 때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더 가까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여러 관계를 병행하며 자율성을 유지했는가’이다. 발해는 특정 국가에 완전히 예속된 체제로 보기 어렵고, 오히려 복수의 외교 채널을 활용해 생존 공간과 영향력을 넓혀 간 국가에 가깝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칭도 바로 이런 대외적 존재감에서 나온 것이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발해를 무시할 수 없는 상대로 보았기 때문에, 발해는 단순 지방정권이 아니라 동방의 강국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3. ‘해동성국’은 번영의 찬사이지만 동시에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는 것은 분명 그 위상을 보여주는 표현이지만, 이 명칭을 그대로 절대화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어떤 별칭은 그 시대의 실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이상화나 외교적 수사를 포함하기도 한다. 따라서 발해가 왜 이런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살펴보는 일과, 과연 그 표현이 어디까지 실체를 반영하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발해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발해를 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블로그 글에서도 이 지점을 함께 다루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우선 ‘해동성국’이라는 말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실제 번영의 징후가 존재했다. 발해는 무왕, 문왕, 선왕 대를 거치며 영역을 확장하고 국가 체제를 안정시켰다. 수도와 여러 행정 거점, 외교 사절 파견, 당과 일본과의 교류, 문화유산의 존재는 발해가 결코 약소한 변방국가가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특히 발해 문화는 고구려 전통과 당 문화 요소가 결합된 독자적 성격을 보여주며, 불교 문화와 건축, 무덤 양식, 공예 등에서도 상당한 수준을 추정하게 한다. 이런 점은 발해가 단순히 군사적으로만 강한 나라가 아니라 정치·외교·문화가 함께 작동한 국가였음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을 전면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발해의 한계도 분명했다. 첫째, 발해는 다민족적 성격을 가진 국가였고, 이는 장점이자 잠재적 취약성이기도 했다. 고구려계 지배층과 말갈계 주민의 관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통합했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논점이다. 국가가 넓고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될수록 통합 비용은 커진다. 제도적 정비만으로 모든 갈등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둘째, 발해의 국제적 위상 역시 시기별 차이가 있었다. 발해가 항상 동일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며, 군주에 따라 외교의 성격과 성과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발해는 결국 거란의 공격 앞에서 멸망했다. 물론 한 국가의 멸망만으로 그 이전의 번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 사실은 발해의 체제가 영속적 강국의 단계까지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도 보여준다.

 

또한 ‘해동성국’이라는 명칭을 오늘날 민족주의적으로만 소비하는 태도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발해를 무조건 찬란한 제국처럼 묘사하면, 오히려 역사적 복합성이 사라진다. 발해의 진짜 의미는 단지 “과거에 우리도 강했다”는 식의 감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고구려 멸망 이후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제도와 외교를 조합하여 위상을 만든 사례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즉 발해의 가치는 결과로서의 찬란함보다, 그것을 만들어 낸 정치적 과정에 있다.

 

이런 점에서 ‘해동성국’은 발해의 객관적 국력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동시대 동아시아가 발해를 바라본 방식과 발해가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방식이 겹쳐진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발해는 실제로 번영했고, 일정한 강국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동시에 그 번영은 복합적 조건 위에 세워진 것이었고,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점까지 함께 보아야 발해를 신화화하지 않으면서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결국 ‘해동성국’은 발해의 찬란함을 보여주는 말인 동시에, 그 찬란함을 가능하게 한 제도·외교·통합의 구조를 묻도록 만드는 역사적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린 이유는 단순히 영토가 넓었기 때문도, 문화가 화려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핵심에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중앙집권 체제, 광대한 공간을 묶어 내는 지방 지배 구조, 그리고 당·일본·북방 세력 사이에서 유연하게 움직인 외교 역량이 있었다. 다시 말해 발해는 내부 운영과 외부 관계가 함께 작동한 국가였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은 찬사인 동시에 해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발해는 분명 번영한 강국이었지만, 그 번영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되고 조정되어야 하는 질서 위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발해를 이해할 때는 이상화보다 구조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발해는 단순한 계승국이나 변방국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만든 국가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오늘날에도 발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